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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咒)

by 베스페라 2022. 9. 10.

나는 영화 장르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보다 선호하지 않는 영화의 장르가 더 많다는 뜻이다. 내가 즐겨보는 영화 장르는 주로 국산 코미디, 범죄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물이다. 로맨스나 사극, 판타지, 특히 SF는 치를 떤다. 공포영화는 내 편식의 범주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편인데, 이는 내가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던 영화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넷플릭스에 접속했다가 메인보드에서 홍보 중인 영화 "주"의 시놉시스를 보게 되었다. 때마침 그날은 집에 아무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고, 나는 납량특집이라는 마음으로 집의 모든 형광등을 소등한 뒤 영화를 재생했다.

 

영화 "주"를 감상한 뒤 내 주관적인 평을 서술하는 글이다.

나는 영화 "주"의 개요를 보며 상당히 흥미롭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 마음을 가진 데에는 영화의 포스터도 한몫했는데, 부처를 닮은 석상이 기묘한 자세로 의식을 치르는 듯한 포스터의 모습은 미스터리물을 좋아하는 내 흥미를 동하게 하는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의 기대는 점점 사그라들었는데, 영화 "주"가 동양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금지된 영역에 손을 대고 저주를 받은 주인공과 오컬트적 요소, 신박하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유행이 다 지난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 기대한 만큼 실망도 적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는데, 공포란 무엇이며 인간이 공포를 느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포인트에서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차라리 서양 공포영화처럼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점프 스케어를 넣었다면 짜릿한 맛이라도 있었을 텐데, 공포로 들어서기 위한 토대가 지나치게 긴 느낌이었다. 기괴하고 음산하며, 그로테스크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흥미롭게 감상했겠지만 짜릿하고 얼얼한 공포를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울 것이다.

영화 "주"는 동양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른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는 다르게 말하면 정석적인 동양 공포의 향신료는 되는대로 첨가했다는 뜻이기에 기본은 한다는 느낌이다. 서양에 악마와 엑소시즘, 폴터 가이스트, 코즈믹 호러가 존재한다면 동양에는 악귀와 사이비, 신병이 존재한다. 나는 개인적 성향으로 서양의 뿔 달린 악마들보다는 인간을 닮은 동양의 악귀들을 더 무서워한다. 영화 "주"는 사이비의 음침한 종교의식과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낡은 사당 등이 잘 구현되어있어 어설프게 서양의 공포를 따라 하려는 시도보다는 이러한 동양 고유의 공포를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공포영화를 본 뒤 남는 찝찝한 여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공포영화가 으레 그렇듯,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꺼림칙한 마무리가 개운하지 못한 뒷맛을 남긴다.

전체적인 평가를 작성하자면 새롭진 않지만 정석적인 공포영화였다. 얼마나 공포스럽냐를 따지자면 내게는 전혀 공포스럽지 않았으며, 차라리 영화 자체의 공포성보다는 기괴한 분위기가 흥미를 동하게 하는 영화였다. 또 다른 동양 공포영화인 "랑종"과 같은 제작사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한 공포 조성 방식에서 오는 정석적인 기법이 안정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지만, 그만큼 진부하고 새로울 것 없는 영화다. 동양풍 공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흥미로 감상해 볼 영화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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