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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뒤틀린 집

by 베스페라 2023. 1. 3.

간만에 집 근처 도서관에 방문했다. 들어서기만 해도 묵은 먼지냄새가 폴폴 나던 낡고 오래된 동네도서관이었는데 최근 리모델링을 하더니 인테리어도 깔끔해지고 책 읽는 공간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앞으로 종종 방문할 듯 싶다. 이런저런 핑계로 책 한 권 읽기를 주저하는 요즘에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던 편안함과 수많은 책장 사이를 거닐며 느긋하게 책을 고르던 여유를 잃은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제법 책 좀 읽는 녀석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소설책이 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백날 서점에 가도 신간코너를 기웃거리다 철학 책을 몇 번 뒤적이거나 시집을 들었다 놓는 게 예사다. 흥미로운 부분만 골라 읽을 수 있는 자기계발 서적과 달리 소설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으니 부담감이 생기는 탓이다. 

 

나는 옛날부터 읽을 책 한 권 고르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2-3시간의 시간을 들여 읽을 책이니, 이왕이면 재밌고 여운이 남는 스토리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수많은 책들이 진열되어있는 책장 사이를 거닐다가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하면 한 번 뽑아서 읽어보고, 영 마음에 안들면 다시 꽂아놓기를 반복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대충 손에 집히는 것을 뽑아온 것이 바로 이번에 읽은 '뒤틀린 집'이다.

 

뒤틀린 집 (전건우)

 

제목과 표지 뒷면의 소개만 짧막히 읽고 골라온 책이라 장르며 줄거리며 아는 것이 없었다. 책을 대출해 집에 돌아오는 내내 제목을 곱씹으며 가정폭력이나 불화에 관한 내용일까 추측한 것이 무색하게 장르는 호러였다. 나는 공포소설을 읽어본 경험이 전무한데, 글로 된 책을 읽으며 공포를 느낀다는게 사실상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감 탓이었다. 아마 이 책도 내가 장르를 미리 알았더라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한창 잘나가던 인기 동화작가 아버지 '현민'에게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울에 살던 가족이 다같이 의성리에 있는 외딴 집으로 이사를 오게된다. 호러물의 도입이 으레 그렇듯 이사온 집에서 점차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이러한 집의 영향인지 가족들도 하나 둘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파헤친 뒤 해결하는 것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이 책의 특징이라하면 총 세 명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초반부에서 어머니 '명혜'의 시선을 통해 집에서 일어나는 괴이현상을 처음 감지하게 된다. 작중 '명혜'가 적에 맞서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하는 행동은 거의 없다. 가족사진이 벽에서 떨어지거나 이상한 말소리가 귀에 맴돌아도 '명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통약을 먹고 억지로 잠에 드는 일 뿐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명혜'의 역할은 오로지 독자로하여금 힘없는 주인공에게 몰입해 대항할 수 없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일이다. '명혜'가 가장 먼저 악귀에게 빙의되며 다음 시점으로 넘어간다. 

 

아버지 '현민'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중반부에서는 집의 비밀을 알고있는 '고만우'나 친구 '창호', '청명보살' 등 다양한 조력자가 등장하여 '현민'에게 직,간접적으로 악귀와 저주에 대한 정보를 전해준다. 초반부가 공포에 집중했다면 '현민'과 함께하는 중반부는 여러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기현상의 원인과 악귀의 정체를 파헤치는 추리가 중점이 된다. 우리는 '현민'과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집이 저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제목 '뒤틀린 집'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된다. 하지만 '현민'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기껏 집을 장악한 저주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이렇다 할 대응은 하지못한 채 '현민'도 악귀에게 당하고만다.

 

악귀의 정체를 파악했다면 남은 것은 퇴마를 하는 일 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어린 아이들밖에 남지 않았다. 후반부는 아들이자 오빠인 12세 소년 '동우'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동우'는 악귀에 빙의된 '명혜'로부터 도망치다가 조력자 '김구주'의 등장과 함께 퇴마에 가장 큰 역할을 하게된다. 작중 가장 박진감 넘치는 클라이맥스가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전해지기때문에 독자는 공포와 스릴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무서운 일에 가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동우'의 어깨를 짓누른다. 

 

'뒤틀린 집'은 내가 감상한 첫 공포장르 소설이다. 전에 접한 적이 있었으나 내가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단순 미스터리 소설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공포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나에게도 이 책은 꽤 만족스러운 소설이었다. 독자가 얼마만큼의 공포를 느끼는가와 관계없이 이 책은 공포라는 장르를 충실하게 구현해내고 있으며, 체계적인 구성으로 차근차근 스토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물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나 찝찝한 구석이 남긴 하지만 그건 공포소설의 매력으로 남겨둘 수 있다.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기막히는 반전이나 통쾌한 액션은 부재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지루하고 뻔하다는 감상이 있을 수도 있겠다.

 

기가 막히게 재밌다는 평을 내릴 수는 없지만, 통 책을 읽지않아 가독력이 많이 저하되었을텐데도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독성 하나는 뛰어난 것 같다. 요즘은 장르를 불문하고 인간과 관계에 대해 은유적이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작품이 만연해서 읽다보면 머리가 아프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게 많다. 그런 작품들은 감상 후에 개인적인 해석을 내놓으며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가끔은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해주는 편한 책들을 읽고싶은 마음이 든다. 공포소설은 특히나 악귀의 정체같은 건 맥거핀 요소로 남겨두고 오묘하고 이상야릇한 묘사로 남겨둘 수 있었을텐데, 추리과정을 통해 독자가 궁금해할만한 요소까지 숨김없이 서술해놓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깔끔한 마무리감을 준다.

어떻게 작가가 글로 우리에게 간담 서늘한 공포를 선사할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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